THE YOOJUNG TIMES

yoojungtimes.com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민족통신’ 발행인 노길남 기자 귀천

코로나-19 감염... LA서 우버택시 기사로 활동

2020-04-26

‘민족통신’ 발행인 노길남 기자 귀천

-코로나-19 감염이 원인으로 증세악화 전까지 LA서 우버택시 기사로 활동
-연세 대학교 재학시절 박정희 군사정권 반대 투쟁에 참여
-1987년 민족문제연구  민족지도자 양성후원단체  한민족연구회 발족
-1999년 민족통신 창간, 남과북을 하나의 조국으로간주하고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편집방향으로 운영하는 자주언론의 대표겸 편집인

April 26, 2020
[유정신보=LA] 편집부

미주지역 로스앤젤레스의 대표적인 친북 매체인 ‘민족통신’ 대표이자 통일운동가인 노길남 기자(76세)가 미 서부시간으로 2020년 4월 25일 오후 5시 41분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귀천했다. 사인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으로, 고인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대표로 있는 ‘민족통신’의 원활한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LA지역에서 부업으로 우버’ (Uber)택시 기사로 활동했었다.



노길남 기자는 지난 1달여 동안 코로나-19 증세로 고생하다 글렌데일시의 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중이었는데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운명했다.

민족통신에 따르면 노씨는 고열과 호흡곤란 증세로 글렌데일의 중환자실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강원도 출생의 노씨는 1973년 미국으로 이주해 현지 동포언론에서 활동하다 1999년 5월 ‘민족통신’을 만들었으며,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재미본부, 6·15 미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4년 4월 3일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한 고인은, 연세 대학교 재학시절 박정희 군사정권 반대 투쟁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연세대학교 영자신문 편집장을 지냈다. 1973년에는 미국으로 유학, 텍사스주립대학 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이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외판원을 잠시 하기도 했으며, 한국일보 미주지사 기자, 코리안스트릿저널 편집장 (대표: 조재길), 뿌리지 편집장, LA ‘라디오코리아’앵커, ‘민족통신’ 대표 등을 역임하며 언론인의 한길을 걸었다.



그는 민족통신 기자 신분으로 75차례 북한을 자주 방문해 북한 고위 관료들의 인터뷰 뿐만아니라 인민들의 생활상의 르포 기사 등을 썼고, 2014년 4월에는 북한의 최고상인 '김일성상'을 받았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해외본부와 6.15해외측위원회에 참여해왔고, 2018년 4월 북한에서 사회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노길남 기자는 지난 20년 동안 민족통신을 이끌면서 언론 영역에서 과감하게 통일운동에 앞장서며 이목을 끌었다.

<민족통신>은 “고 노길남박사의 삶은, 오직 분단된 조국통일위해 본인의 직장 경제 가정까지 모두 뒤에 두고 정의와 진실로 책임과 활동으로 실천한 지식인”이라며 “조국의자주 평화통일위해 한평생 추구한 그 고귀한 애국정신 민족통일운동사에 영원히 살아 빛날 것이며 못다한 통일염원 우리몫이 되었다”고 기렸다.

장례식은 따로 하지않고 가족 위주로 추모 모임만 갖기로 했다고 전해졌다.

유족으로는 고인의 부인인 노경숙 여사와 슬하에 두 딸과 3명의 손자 손녀가 있다.



——

*발췌). 페이스북
April 25, 2020

글: 이인숙 선생

수십년간  미국에서  통일의 운동에 모든 것을 바치신 노길남 선생님께서  Covid – 19으로 결국 4월 25일 저녁 5시 41분(LA 시간)에 운명하셨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라리아 약이 효능을 발휘하기를  간절히 기대했지만 ……

저에게 사망소식을 알려주시며  흐느끼시는 손세영 선생님을 위로했지만  저도  진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너무 허망하고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하기만 합니다.

노선생님께서  3월 20일경에 감기 증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에게    전화를 하셔서  “내가 열이 좀 있는데  체온기가  떨어져서 … “ 라고 하셔서  열이 얼마나 되나요? 라고 내가 묻자  화씨  99도 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보통 독감도  그정도가 되니 물을  많이 많이 드시고 푹쉬세요라고  말씀  드렸지요. 
더욱이 노선생님은 매년 이맘때 되면 한번씩 이렇게  감기를 앓는다고 하시기에  저는 처음에 Covid – 19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전화 하기전에  노선생님은  의사한테 전화를 했더니Covid – 19는 아닌 것 같지만 한번 와 보라고 했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다음날  괜찮으신지 걱정이 되어 전화드렸더니  언제나 상쾌하고  명랑한  그 음성으로  “많이 좋아졌어”  라며, 아무것도  한것 없는 나에게  고마워 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다음 날인가 이틀 후인가  다시 전화를 했더니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이상하고 ,두렵게까지  느껴지는  허스키 목소리에  숨이 차서  말씀 한마디 하는 것조차 힘들어 하셔서  내가 너무 깜짝놀라  Covid – 19로 의심되기에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세요 라고 강요했습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  한시간  거리이기는 하지만  내가  당장  응급차를  부르겠다니까  겨우 어렵게 하시는말씀이  “ 내가 할께” 라고 아주 힘들게 말씀 하셨어요.
 
그리고 병원에 입원하시는 동안 가족을 비롯해  아무도  병문조차 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노선생님이 병원에서 손선생님께  전화를 했을때 손선생님이  무슨 말인지 잘  알아 들을 수 없었다고 하셨는데 후에 생각해보니 그것이  인공호흡기 전 단계인  BYPASS 였던 것 같습니다.
인공호흡기는 아니지만 강력한 압력으로 마스크를 통해  산소를 폐로 공급하는  기구입니다.그리고 결국  상태가 안좋아져  인공호흡기를  끼셨습니다.

인공호흡기를 끼기 전에  노선생님은 자꾸 집에 가고 싶다고 하셨지만  그럴 상황은 아니였지요. 
그후로  노선생님과 한몸 같으신 손세영 선생님과 거의  매일  통화를 하면서  노선생님 건강 상태를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말라리아 약을 투요하기 시작했다고  했을때  저희는  그 약이 어떤 기적을 일으키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

그러나 상태는 더 악화되었고  혈압도 떨어지고, 신장까지 나빠져  투석을 시작했었습니다.
 Covid – 19 이  폐, 콩팥, 심장기능을 다 파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4월 15일  담당의사가  사모님께 전화를 해서 상태가 더 안좋아진다고 알린후 ,  화상으로  노선생님의 모습을    손세영 선생님, 사모님 그리고 그 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70이 훨씬 넘으셨어도 정열적이고  만년 청년같이 활동적이셨는데 ….. 믿기지 않습니다.  제가 버릇없게  언성을 높이기도 했었는데  다 후회가 되고 마음이 아픕니다.

더욱이Covid – 19 로 돌아가셨기에  마지막 가시는 길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입관식에  총  10명만이 참석할 수 있으며  그것도 한번에 5명  2시간후에  5명 모두 10명이라 합니다.
하관식에는  누구도 참석할 수 없다네요.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습니까? 
노선생님 , 마지막 가시는 길마저 보지 못하는 마음 메어집니다.
수십년의 세월  빨갱이  소리 들어가며  조국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땀흘리며 수고하신 그 씨알이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그 수고  다 내려 놓으시고 편히 쉬십시요.





Comments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
 
 
 
미국 LA, 세월호 참사 10주기 추모집회 열려
우리학교와 함께하는 동포모임-구량옥 변호사 초청 강연
세월호 참사 10주기 LA 추모제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