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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취재한 Albert Taylor 기자의 집 ‘딜쿠샤’(Dilkusha)사적지 전시관으로 개방

2021-03-01

독립운동 취재 Albert Taylor기자의
‘딜쿠샤’(Dilkusha)가옥...사적지 전시관으로 개방

-테일러 특파원...’독립선언’으로 시작된 한국의 3.1운동 뉴스 최초로 전세계로 타전
-1942년 테일러가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면서 방치된지 80년 만에 복원
-손녀 제니퍼 테일러씨는 "한국은 할아버지의 진정한 고향이었다"

3·1운동을 전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미국인 기자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1948)의 가옥 '딜쿠샤(Dilkusha)'가 사적지 전시관이 돼 시민들에게 개방된다. UPI통신사 한국 특파원 토마스 마레스카 기자가 2월 26일 보도한 내용을 번역 정리 소개한다. (편집부)

[UPI] 리포트: 토마스 마레스카

미국의 금광 엔지니어이자 UP통신(현 UPI)과 AP통신의 한반도 특파원인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는 1919년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에 대한 강제 식민 통치에 항거하는 기미 ‘독립선언’으로 시작된 한국의 3.1 운동에 대한 뉴스(Declaration of Independence against Japanese colonial occupiers)를 전세계에 전했다.

테일러 기자는 일본군들이 수십명의 민간인을 한 교회로 유인해 가둬놓고 불을질러 살해한 ‘제암리 학살’을 포함하여 이후의 대규모 저항시위와 일본의 잔인한 탄압을 취재했다.

테일러 기자와 그의 아내인 영국 여배우 메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는 1923년에 붉은벽돌 양옥집을 지었고, 힌두어(Hindi)로 “마음의 기쁨” ("Heart's Delight")을 의미하는’딜쿠샤’ (Dilkusha)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테일러 가족은 1942년 일본인에 의해 추방 될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 그후 수십년동안 이 집의 역사는 잊혀졌다. 한국정부가 2016년 개보수 과정을 시작하여 3.1 운동 102주년 기념을 며칠 앞둔 금요일 전시관 개장으로 정점을 찍기 전에는 오랫동안 건물이 방치되어 파손되었다.


‘딜쿠샤’ 정초석에 새긴 구약성경의 ‘시편’(*127편 1절)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한글 역 발췌: 최민순 신부 (‘시편’ 126편)


서정협 서울시장 권한대행은 개장식 리본 절단행사에서 "전화나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에 일제 식민지 불의에 치열하게 싸운 한국인들의 목소리를 전세계에 알리는 유일한 방법은 외국인의 펜이었다"고 말했다.

“테일러는 일제의 투옥과 추방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기록자이자 역사의 증인으로서 한국인과 함께 있었다...테일러가 보고한 3.1 운동 ‘독립 선언서’는 세계가 한국의 독립을 옹호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불꽃이 되었습니다”, 라고 서정협 시장대행은 말했다

테일러의 부인, 메리 테일러의 회고록 ‘체인 오브 앰버’(“Chain of Amber”)에 따르면 앨버트는 이제 막 아들을 낳은 서울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하던 중 우연히 ‘독립 선언서’를 우연히 접했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들은 그 병원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문을 인쇄하고 있었고, 일본인이 급습했을 때 간호사가 선언문 사본을 테일러 아기의 침대에 숨겼다.

한국어에 능통한 앨버트 테일러 기자는 그 사본을 찾아 해석 인용해 급증하는 대한독립운동에 대한 기사를 써서 즉시 친동생 윌리엄에게 전달했고, 윌리엄은 형의 기사를 구두 밑창에 숨겨 당시 전신설비가 갖춰져 있는 일본으로 건너간 직후 전신(telegraph)으로 미국으로 타전 했다.

뉴욕 타임스에 실린 그의 기사는 "한국의 독립선언은 정의와 인류의 이름으로 말하는 2천만명의 목소리를 대변한다”(The declaration of Korea's independence says that it represents the voice of 20,000,000 persons, speaking in the name of justice and humanity.")라고 보도 된다.

독립운동이 활발해지자 약 200만명의 한국인이 시위에 참여했고 수천명이 일본인에 의해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앨버트 테일러는 추방되기 전 1941년에 일본인에 의해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신문기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이 해방이 된지 3년 뒤인 1948년 73세의 나이로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별세한다.

2005년이 되어서야 앨버트 기자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는 한국의 한 교수에게 연락하여 그가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을 찾는데 도움을 받고, ‘딜쿠샤’가 역사적인 회귀로 돌아왔다.

전체적인 복원과정은 2016년에 시작되었으며, 26일 금요일 복원된 건물개장을 위해 테일러 기자의 손녀 제니퍼씨가 캘리포니아주 멘도시 그녀의 집에서 먼 여행을 떠나 서울시에 1,000개가 넘는 가족의 유품을 기증하는 행사에 참여까지 포함된다.

손녀 제니퍼씨는 "조부모님을 대신하여 그분들의 정당한 휴식 장소인 딜쿠샤에게 소중한 추억의 유품을 되돌려 드려 제자리를 찾게된 이 유물 대부분이 앞으로 딜쿠샤 집에서 보게되는구나해서 제 마음속으로도 매우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서울의 고적지 경복궁에서 멀지않은 언덕에 위치한 이 2층집은 현재 한쌍으로 어울리는 생활공간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으며, 테일러의 생전 사용한 타자기와 그가 서울에서 제출한 기사의 사본과 같은 개인 물품을 전시한 여러 개의 방이 있다.

손녀 제니퍼 테일러는 복원된 사적지 딜쿠샤가 한국방문객들로 하여금, “한국과 연대하고 독립을 위한 투쟁을 했던 외국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데 도움이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회고록을 TV로 각색한 한국의 프로듀서이자 감독과 함께 작업하고있는 제니퍼 테일러는 할아버지가 항상 한국에 돌아오길 바랬지만 기회가 생기기 전에 심장마비로 안타깝게도 별세하셨다고 말했다.  알버트 테일러의 유해는 그의 아내가 한국으로 가져와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치되어있다.

손녀 제니퍼 테일러씨는 "한국은 할아버지의 고향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단 한가지 소망은 돌아오는 것이었다."(“Korea was his homeland," Jennifer Taylor said. "From the minute he left, his one desire was to return.")

*
참고).
영자기사와 관련사진은 아래 UPI 원문주소를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기사원문: [UPI]
Home of UPI reporter on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pens as historic site
(Feb 26, 2021)

https://www.upi.com/Top_News/World-News/2021/02/26/skorea-Albert-Wilder-Taylor-UPI-Korea-Dilkusha-house/5611614340939/
 
참고).
카톨릭 성경 ‘시편’(127편)
https://youtu.be/pp2Q_UQyYbk

KBS 다큐멘터리 “딜쿠샤 이야기”
https://youtu.be/hPsXMxr2LY8?si=3JtAmKidPtKCmG6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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