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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 제작 '조선전도'의 독도…정확히 우리영토 표시

독도가 우리 고유영토라는 사실, 이미 19세기에 서양에 널리 알려져

2017-11-04

성 김대건 신부 제작 '조선전도'에 나타난 독도…정확히 우리영토 표시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Carte de la Corée)

- 조선전도는 서양에 알려진, 한국인이 제작한 첫 한반도 지도
-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년)보다 15년 앞서 근대적 작도법에 의해 작성된 지도
- 울릉도와 우산(于山-독도)을 정확히 우리영토로 표시
-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는 오늘날 독도영유권문제에 있어 독도의 정확한 위치와 명칭을 서양세계에 알린 최초의 지도
- 독도가 우리의 고유영토라는 사실이 이미 19세기 중엽에 서양에 널리 알려졌고 일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자료

[유정신보=LA] 자료발췌정리 - 편집부

1846년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작성한 조선전도(Carte de la Corёe)는 그 원본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78년 사본이 국내에 입수되어 현재 국회 도서관, 독도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독도가 울릉도 바깥쪽에 정확히 그려졌고, 지명이 비록 프랑스어로 표기되었지만 우리의 고유명칭을 순수한 우리말의 발음 그대로 옮겨졌다. 울릉도는 ‘Oulangto’로, 독도는 ‘Ousan’ 즉, 우산(于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주로 중국과 일본의 정보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지도를 그리던 서양세계에 최초로 소개된 우리의 지도로서 서양세계의 지리적 인식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15년 앞서 근대적 작도법에 의해 작성된 지도


울릉도와 우산(于山-독도)을 정확히 우리영토로 표시.

이 지도는 청나라 주재 프랑스 영사를 거쳐 1849년 프랑스로 옮겨졌으며, 1855년 프랑스 리용'지리회보'에 축소 수록되었고, 6개국어로 번역되어 서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주로 중국과 일본의 정보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지도를 그리던 서양세계에 최초로 소개된 우리의 지도로서 서양에 지리적 인식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지도의 원본은 현재 프랑스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 사진 (LA 성 바실성당 - 대건회 제공)

기사발췌:

<성 김대건 신부 제작 '조선전도'에 나타난 독도>
로마자로 'ousan' -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표기

2008. 07. 27발행 [980호]
[가톨릭평화신문]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관련해 한국 천주교회에서 독도가 우리 땅임을 분명히 명기한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고 있다. 조선전도는 서양에 알려진, 한국인이 제작한 첫 한반도 지도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소개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는 1970년대 후반까지 김 신부 자신의 서한과 달레 신부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의 기록만으로 전해졌다. 유럽 어디엔가 소장돼 있을 것이란 풍문만 무성했을 뿐 그때까지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눈으로 직접 확인한 한국인은 없었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한국인 최초로 찾아낸 주인공은 바로 최석우(안드레아, 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몬시뇰이다. 1978년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가 유럽 어딘가에 있을 것이란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은 최 몬시뇰은 이듬해 무작정 유럽으로 날아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고문서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고문서고를 샅샅이 뒤져도 지도를 찾을 수 없었던 최 몬시뇰은 낙심하다 갑자기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가 유럽학계에 발표됐다면 분명 지리학사전에 소개돼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1879년에 저술된 생 마르탱의 「세계지리사전」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사전에 그토록 갈망하던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 원본이 파리국립도서관 지도부에 소장돼 있다"는 것과 "1855년 그 지도가 프랑스 지리학회지에 소개됐다"는 내용이었다.
최 몬시뇰은 그 즉시 파리국립도서관으로 달려가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와 감격적 '상봉'을 했다. 그리고 도서관 지도부의 협조로 필름 촬영을 한 다음 귀국해 관동대 방동인 교수 도움으로 200만분의 1로 축소한 지도를 간행했다.
 
 ▨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
 김대건 신부는 1845년 4월 7일자로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친필 서한에서 그해 조선전도를 제작했다고 밝힌다. 당시 부제였던 김 신부는 몰래 귀국해 선교사들의 안전한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이 지도를 제작했다.

 김대건 신부는 지도에 불필요한 산이나 강 이름 등을 빼고 전국의 주요 관부와 병영 266곳, 만주 봉황성에서 의주까지 들어오는 도로, 남해안 해로 등을 수록했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는 또 우리나라 지명을 우리 발음 그대로 로마자로 표기한 최초의 지도이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 이전에 서양에 알려진 우리나라 지도는 프랑스 왕실지리학자 당빌이 제작한 '조선국도'와 독일인 시볼트가 제작한 '조선반도도'가 전부였다. 당빌의 조선국도는 북경 주재 프랑스 예수회원들이 10여년간 수집한 중국과 조선측의 자료를 근거로 제작해 조선 지명이 모두 중국발음으로 표기돼 있다. 또 시볼트의 조선반도도는 일본원도에 의거해 그린 지도였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는 서양에 우리 지명을 소개한 첫 지도다.

 1855년 프랑스에서 간행된 지리학사전에는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에 대해 "김대건은 분명히 당빌과 시볼트가 사용한 것과는 다른 지도나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 그의 지도를 작성했다. 과학적 여건이 명백히 결여돼 있음에도 거기에는 우리가 항상 참고해야 할 많은 정보들이 있다. 그것은 예수회 수사들이 천문학적 원리에 의해 수정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중국인들이 작성한 지방지도와 상이한 것이다. 달레가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한 지도는 김대건지도와 결부시켜야 할 것이다"고 평가했다.

 김대건 신부는 한성부서관에 보관돼 있는 공식지도를 참고해 조선전도를 제작했다. 야인인 김대건 신부가 어떻게 규장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한성부서관에 있는 지도를 입수할 수 있었을까? 이에 최석우 몬시뇰은 당시 고관을 지낸 이들이 관에서 만든 지도를 갖고 있을 가능성도 컸지만 일반인들도 관부에서 필사돼 유포된 지도들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는 중국 변문에서 최양업 신부(당시 부제)와 함께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매스트르 신부에게 전달됐고, 매스트르 신부는 중국 상하이에서 자신들을 도와주던 프랑스 총영사 몽티니에게 이 지도를 건냈다. 몽티니는 프랑스로 귀국해 이 지도를 왕립도서관에 기증했고 오늘날까지 파리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는 이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입수한 조선해도를 참고로 리델 주교에 의해 보완됐고, 달레 신부 역시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에 교우촌을 첨가하고 프랑스 해군성 지도를 참고해 조선 해안선 일부를 수정해 자신의 조선전도를 제작, 한국천주교회사 저서에 수록했다.
 
 ▨ 김대건 조선전도에 표기된 독도
 김대건 신부는 자신의 조선전도에 대부분의 산과 강 이름을 삭제했음에도 울릉도와 독도를 기입해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김대건 신부는 조선전도에 울릉도 동쪽에 독도를 그리고 로마자로 'Ousan'이라고 뚜렸하게 표기했다.(사진 아래 확대한 지도 오른쪽)독도는 조선 후기인 1881년(고종 18년)부터 '독도'로 불렸으며 이전에는 삼봉도(三峰島)ㆍ우산도(于山島)ㆍ가지도(可支島) 등으로 불렸다.

 리델 주교는 1869년 「한중일 지도」를 제작하면서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참고해 독도를 명기했고, 달레 신부 역시 1874년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보완해 제작한 자신의 「조선지도」에 독도를 조선 땅으로 표기했다.

최석우 몬시뇰은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는 당시 주로 중국과 일본의 정보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지도를 그리던 서양세계에 최초로 소개된 우리의 지도로, 서구 사람들의 지리적 인식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또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는 오늘날 독도영유권문제에 있어 독도의 정확한 위치와 명칭을 서양세계에 알린 최초의 지도이며, 독도가 우리의 고유영토라는 사실이 이미 19세기 중엽에 서양에 널리 알려졌고 일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강조했다.     

<성인 김대건 신부>


김대건 신부 사진: (LA 성 바실성당 - 대건회 제공)

성인 김대건 신부 - 7월 5일 축일

Saint Andrew Kim Taegon (김대건 안드레아, 金大建) (1821–1846), was the first Korean-born Catholic priest and is the patron saint of Korea.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상해로부터 20리가량 떨어진 김가항(金家港)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고, 그곳의 만당(萬堂)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드림으로써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황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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