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대한 문인들의 감회 2편
Oct 12, 2024
-김명인 교수(인하대학교 명예교수)페이스북 발췌
-박찬승 교수(한국근현대사) 페이스북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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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한 강 《소년이 온다》 中
I. *한강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감회
김명인 (인하 대학교 명예교수)
훌륭한 번역을 통해 세계의 독자들이 비로소 한국문학이라는 두꺼운 책의 한 페이지를 열어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나는 이것이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생각한다. 한강은 두말할 것 없이 뛰어난 작가이지만 그의 성취는 한국 근현대문학이라는 풍요로운 토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풍요로운 토양’이라는 것은 반어이다. 한국문학의 풍요로움이란 ‘식민지-전쟁-분단-냉전-군사독재-압축성장-민주화-극한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관통한 완강한 가부장주의’ 라는, 근대세계가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역경을 다 거쳐온 한국현근대사라는 척박한 흐름 위에서 얻어진 역설적인, 문학적 풍요이기 때문이다.
분단 이후의 남한의 소설문학으로만 한정하더라도 최인훈, 김승옥, 이청준, 이문구, 조정래, 황석영, 김원일, 현기영, 조세희 등의 남성작가들과 박경리, 박완서, 오정희 등의 여성작가들이 이뤄온 성취는 세계근대문학의 지형도에서 영미권이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제3세계 어떤 곳의 문학적 성취와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 중에서 최인훈, 이청준, 조정래, 황석영, 현기영, 박경리, 박완서 정도는 한국어라는 핸디캡이 없었다면 벌써 노벨상 후보로 여러 차례 거론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작가들이었다. 다만 한국어라는, 서구어로 번역되어야만 하는 소수어로 쓰였다는 것, 게다가 노벨상의 국제정치학상 한국의 배당율이 워낙 낮았다는 것 등 악조건만이 문제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간 한국문학이 노벨상을 못 받아 문제였던가, 오히려 문학 생태계의 지속적 열화가 더 문제였지 않은가.
하지만 마침내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것은 우선 한국문학이 한국의 문화적 위상 제고에 따라 번역보급의 문제를 극복하기 시작했고 국제무대에서의 배당율도 높아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 적절한 때에 한강이라는 묵직한 작가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부커상, 메디치상 등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아온 ‘준비된 후보‘였다.
그러면 왜 황석영이 아니고 한강이었을까? 황석영 자신이 고은과 더불어 오랫동안 노벨상에 공을 들여온 것은 좀 씁쓸하지만 다 아는 사실이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황석영은 오랫동안 한국의 대표작가로서 ‘군림’해왔기 때문에 그가 한국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가 되더라도 하등 이상할 일이 없다.
하지만 확실히 황석영은 한강에 비해 낡았다. 그는 알다시피 정통 리얼리즘 작가다. 그리고 그만큼 근대소설의 문법에 충실한 작가라는 뜻이다. 근대소설은 ‘성숙한 남성성의 형식’이며 이미 그 여정을 알고 떠나는 주체의 여행이다. 황석영의 대표작인 <객지>나 <삼포가는 길>의 주인공들은 내일을 모르나 작가는 그들이 내일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 방황은 사실은 계산된 방황. 여행이 끝날 줄 알고 떠나는 여행이다. 근작들인 <손님>과 <철도원 삼대>에 이르면 죽은자들이 무시로 등장하여 산자들을 이끄는 ‘초현실’이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 속 인물들의 운명은 ‘선험적 진리’가 견고하게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19세기 이래 근대소설의 전형적 상황이다.
하지만 한강의 소설들은 이와 다르다. 그의 소설들에는 질문들은 무성하나 대답은 없다. 쓰고 있는 작가 역시 대답을 모른 채 질문의 형식으로 소설을 끌고 간다. 이것은 탈근대, 혹은 후기 근대적 글쓰기의 전형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게다가 한강 소설들의 여성인물과 여성화자들은 오래도록 확고한 진리의 세계(근대의 가부장적 남성들의 세계)에서 밀려나 있던 주변인, 소수자, 타자들의 형상으로 그들의 언어는 늘 진리에서 비껴난 형식으로 발화되고 전달된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은 육식의 세계에서 보장받지 못해 소멸해가는 소수자 여성의 존재성을 스스로 식물이 됨으로써 겨우 지켜낸다. 그리고 이처럼 주류의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마멸되어가는 여성 등 소수자들의 존재성이 거대한 국가폭력을 만났을 때 어떻게 자기를 보존할 수 있는가를 묻는 소설들이 바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이다. 나는 그것을 ‘기억과 애도의 정치학’이라고 부른 바 있다.
한강의 소설은 루카치가 말한 근대장편소설의 미달태이고 기본적으로 루카치가 단편소설을 이야기할 때 겨우 인정해준 ‘서정시‘적인 성격을 가진다. <채식주의자>나 <소년이 온다>가 하나의 장편서사라기보다는 몇개의 작은 서사들의 연쇄로 이어진다는 것,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사실과 몽환 사이의 어디쯤에 있다는 것 등이 것이다. 그것은 객관적 진리에 의해서는 보증될 수 없는 ‘미숙한 주체’들의 산문형식이다. 하지만 그 ‘미숙성’에서 새로운 언어가, 형식이, 사상이 탄생한다.
그런데 요즘 한국소설은 이런 형식들이 대세를 이루고 그 대부분이 젊은 여성작가들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오래도록 민족 민중 계급 등으로 표상되어온 한국문학의 고질적 남근주의, 가부장주의에 대한 집딘적 반란이라 할 수 있으며 나는 이것이 어느덧 21세기 한국소설의 주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강은 1970년생으로 이러한 당대 주류 한국소설의 리더, 맏언니의 자리에 있다. 그리고 노벨문학상 위원회는 우연인지 모르나 한강의 이러한 문학적 위상을 귀신같이 알아채서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다. 고맙고 기쁜 일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가지는 의의이다. 아마도 한 10년 후를 전후해서 한국은 다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영광의 기록이 아니라 고통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토록 사람들을 들들볶아서 유지되는 한국사회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역량이 충분히 확대재생산 가능하다고 본다.
드디어 노벨상 수상작을 원어로 읽는, 아니 심지어 이미 읽은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어떤 트위터러의 촌평에 미소지으며…
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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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한국근현대사)
II. 한강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감회
ㄱ. “소년이 온다” 완독 전
솔직히 말해서 나는 <소년이 온다>를 오래 전에 사서 읽다가 읽기가 너무 힘들어서 중도에 포기했다. 이후에 작가 한강의 소설은 나에게는 기피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여 <소년이 온다>를 다시 꺼내어 처음부터 다시 읽고 있다. 힘이 들어도 이번에는 끝까지 읽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도 이어서 읽어볼 예정이다.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한강 작가도 역사를 소재로 한 이런 소설을 쓰기 위해, 광주와 제주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취재를 하고 또 많은 자료를 읽은 듯하다. 어느 신문의 기사를 보니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는 송기숙선생이 이끌던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에서 펴낸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을 열심히 읽었고,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기 위해서는 제주4.3연구소에서 펴낸 여러 구술자료집, 예를 들어 <이제사 말햄수다>시리즈, <4.3과 여성>과 같은 자료집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사실 작가들은 역사가가 아니기 때문에 논문이나 책보다는 이런 구술자료집에서 구체적인 소재와 큰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한강 작가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구술사 채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하지만 광주에서는 1988년에 송기숙 선생이 설립한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의 5.18 증언 채록이 시작되었다. 이 구술 작업에 참여한 증언자들은 모두 5백 명에 달했다. 모두 1652쪽에 달하는 이 방대한 자료집은 나병식 선생의 풀빛출판사에서 1990년 5.18 10주년을 맞아 발간되었다. 그리고 이후 이 책은 5.18 연구의 기초적인 자료가 되었다.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는 이후 전남대로 들어가 5.18연구소가 되었다. 송기숙 선생과 나병식 선생은 이제 모두 고인이 되었다.
제주4.3연구소는 1989년 설립되었는데, 초대 소장은 '순이삼촌'의 작가 현기영 선생이 맡았다. 4.3연구소는 발족 직후부터 증언자료집 <이제사 말햄수다>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후 3권까지 나왔다. 2015년에는 <제주4.3증언총서> 7권이 나왔고, 2019년에는 <4.3과 여성, 그 살아낸 날들의 기록>이 나왔다. 그밖에도 <제주4.3유적> 등 많은 자료집이 나왔다. 그리고 다 아시다시피 현기영 선생은 작년에 4.3을 소재로 한 소설 <제주도우다> 세 권을 펴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필자도 1990년대부터 전남, 충남 지역을 중심으로 구술증언을 채록하여 <마을로 간 한국전쟁>(2010), <혼돈의 지역사회>상,하(2023) 등을 발간한 적이 있다. 이 책들을 쓰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책에는 차마 쓸 수 없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그런 때는 내가 차라리 소설가였으면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요즈음은 각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지역사 연구단체 등에서 지역사를 대상으로 한 구술사 채록 사업을 많이 하고 있다. 이런 사업들은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것 같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엄청난 자료가 된다. 그리고 그런 자료들은 연구자들,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들에게는 정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컨텐츠가 된다. 이번에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의 한켠에는 광주와 제주의 이름없는 연구자들이 진행한 구술 채록 작업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의 그런 작업이 없었다면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한 작가가 그 엄청난 사건에 휘말린 한 개인의 스토리와 생각, 감정 등 내밀한 부분까지 들여다 볼 수 있었겠는가. 오늘도 묵묵히 지역사회에서 구술채록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분들에게 "여러분은 지금 노벨문학상 작가를 만들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응원을 보내고 싶다.
박찬승 학자(한국근현대사)
페이스북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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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소년이 온다” - 독후감
박찬승 교수(한국근현대사)
어제 그제 이틀 동안 <소년이 온다>를 다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은 뒤,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맺혔다. 왜 그랬을까.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가여워서였을까. 5.18묘지에 묻혀 있는 나의 벗이 생각나서였을까.
책을 읽으면서 계속 감탄한 것은 작가 한강의 '용기'였다. 5.18 당시 금남로에서 싸우던 이들, 도청에 끝까지 남아 산화한 이들 못지 않게 작가 한강은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국가폭력을 이렇게 강한 문체로 비판하고, 인간의 폭력성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낸 경우는 별로 보지 못하였다. 20세기 한국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강렬한 문체로 글을 쓴 이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었다. 그의 '조선혁명선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도 여러 곳에서 나는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강한 문체로, 쓰기 힘든 내용의 글을 써나간 작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작가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여리지만, 내면은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힘든 작업을 끝까지 밀고 나간 작가의 용기와 기백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면서도 <소년이 온다>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인간은 한편에서는 끝을 알 수 없는 잔인성, 폭력성을 가지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양심과 용기를 갖고 폭력에 맞서 싸우고 서로 연대할 줄도 안다는 것을 작가는 강조한다. 작가가 힘든 작업을 끝까지 해나갈 수 있었던 진정한 힘은 그의 '선한 인간성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소년이 온다>는 소설이고 문학이다. 역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부분들, 사실을 각색한 부분들이 많다. 또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운 부분들은 상상력으로 채워놓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것이 문학이다. 문학은 역사적 사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삶의 의미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역사와 구분하지 못하고 역사왜곡이니 어쩌니 하는 이들은 문학이 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소년이 온다>를 넘어 이제 <작별하지 않는다>로 건너가려 한다. 한강은 한국문학이 배양하여 세계에 내놓은 작가다. 한국문학이 이 정도 수준에 오른 것을 뿌듯하게 생각한다. 작가 한강과 한국문학계에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전한다. 아직 <소년이 온다>를 읽지 못하신 분들은 꼭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박찬승 교수 페이스북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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