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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장발굴] 강처중, “충무공 이순신”

2019년 올해는 충무공 탄신 474 주년을 맞이한다

2019-01-21

[명문장 발굴 소개]

강처중 칼럼, “충무공 이순신”

“이 충무공 탄생 402 주년을 맞이하여” 1947년 04월 27일자 경향신문
*(2019년 올해는 충무공 탄신 474 주년을 맞이한다 – 이순신 장군은 1545년 4월 28일  현재는 중구 인현동 1가인 한양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유정신보=LA] 편집부
심흥근 기자: *한글 타이핑; 전문 순한글로 옮김 (2019년 1월21일)

[경향신문 (1947년 04월 27일자)] 전재

“충무공 이순신”
1947년 04월 27

강처중

우리는 이조 역대인물 중 저명한 분으로 김한훤당(김굉필 – 호는 ‘한훤당’- 조선전기의 성리학자), 조정암, 이퇴계, 이율곡, 서화담, 송우암 등 많이들 수 있다. 그들은 이조 봉건제의 전형들이며 양반계급의 백미들이며 유교 학풍의 거상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제도와 그들의 계급이 사라지고 그 학문마저 빛을 잃고 보니 그분들도 함께 민족의 머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위대하던 율곡도 왜 위대한지를 금일의 후인들은 모르는 체 고물과 함께 앞으로 박물관에 모셔질 운명에 이르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시대가 새로울사록 우리에게 더 빛나는 것은 웬일인가.
그것은 인민을 위하고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과 함께 강토를 지킨 때문이다,.
인민은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민과 함께 싸우던 위대한 인물들은 영원히 민족의 마음속에 사는 것이다.

그런 위대한 인물들은 민족의 존망의 위기에 나와서 인민과 함께 그 위기를 극복하고 간 분들이다.

때문에 그 민족이 위기에 당면하면 그 인물을 더욱 사모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같은 정세에 처하여 이순신을 가일충 사모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냥 영웅 이순신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동고동우하며 투쟁하던 이순신이 그리운 것이다.,



이순신을 위대케한 요인은 물론 많다. 해동제갈의 칭호를 받은 그의 지략과 전술과 용병도 그 하나며 충용정명도 그 하나이며 만단 전비와 십분조련도 그 하나며 철갑귀선(거북선)도 그 하나이다. 왜인의 남해지리 불통도 들 수 있으며 남방곡창이 왜인의 손에 둔 것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국정을 살펴보면 연산군이래 사화정쟁으로 참혹한 유혈극의 여파가 그대로 생한데 다시 동서당론이 벌여져서 국론이 일치 못하였고 국방과 전략과 군비는 고사하고 왕과 백관들은 의주변지에 피란하여 버리고 육전은 연일 패배가 계속하여 왜제가 전국을 짓밟고 있었다. 더욱 이순신은 당파적 배경이 없는 때문에 정치적 고립으로 매사에 지장이 속출하였다.

이런 처지에 일개 영웅 이순신의 지략이나 구선만이 어떻게 광대한 해양에서 승리를 전취할 수 있겠는가.

이순신은 이것을 잘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인민을 믿고 인민을 위하여 인민과 함께 그 위태로운 전쟁을 수행하기에 시종여일 하였던 것이다.
그가 남겨놓은 그의 언행 속에는 얼마든지 민중과 동고동우한 사실의 기록이 남아있다.

짧은 지면이라 다만 한가지의 대목의 예를 들어 이순신과 민중이 얼마나 가까웠으며 또 같이 그 난을 겪었는가 하는 것을 말하려 한다.

왕과 지배관료들이 서울을 떠날 때 민중들은 왕이 자기를 버리지 말고 함께 서울을 고수 할 것을 애원하였다. 그러나 궁중에서는 승혜와 백금을 무역하고 암야에 그들은 도망치듯 민중 모르게 떠났다.

이것을 안 민중들은 증오하는 나머지 원부 장계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고 송도에서는 왕에게 투석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어떠하였는가, 그가 종적죄로 나포되어 함거에 실려 서울로 갈 때 열읍 길가에는 남여노유 민중들이 모여 통곡하였다. 또 절망하였다.

그가 다시 놓이어 통제사로 재임되어 임지로 나려갈 때 민중들은 연도에 운집하여 곤장을 바치며 울고 환영하였다. 또 안도하였다.

이순신은 그들을 위로 하였다. 얼마나 천양의 대조인가.

그가 위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날 후인들이 이순신을 사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시호 충무공으로 이글을 쓰지 않고 이순신으로 착고 성명하는것도 그가 인민과 함께 지금도 살아 있으므로서 더 다정을 느끼는 까닭이다.

충무공 시호를 나린 왕은 이미 갔으되, 이순신 장군을 부르며 따루고 믿던 인민은 여전히 멸치 않고 있는 까닭이다. (강처중, 1947).


사진: 심흥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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