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계올림픽 홍보 역활에 나선 LA권용섭 화백
- 애국하지 않을 수 없는 사연으로
-'Let s go to Pyeong Chang together' 수묵화 퍼포먼스 유럽순회 펼쳐
2017년 12월 08일
[유정신보=LA] 심흥근 기자 (
inchon7080@gmail.com)
대한민국은 온갖 적폐를 드러낸 정권이 바뀌었다. 미사일을 앞세운 북한의 파란만장한 대미 외교사가 최근 ICBM’화성-15형’의 실험으로 정점을 이루며 어수선한 가운데 곧 평창 동계올림픽개막식이 60여일 앞으로 다가온다. 전세계 재외동포들도 한마음으로 모국의 평창 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잘 치러지길 기원하고 있다. 행사일정은 내년 2018년 2월 9일(금) ~ 2월 25일(일)로서, 개최지는 대한민국 평창, 강릉, 정선 등으로 결정됐고, 대회규모는 80개국 6,000여명 참가하며 15개 종목, 102개 경기로 국가간 친선에 입각한 선의의 경쟁을 벌인다. 한편, 평창동계올림픽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LA의 한 동포가 있는데 바로 본국에서도 잘 알려진 독도화가 권용섭화백이다.
권화백은 한국화 중 수묵화를 주로 그려오고 있다. 지난 20여년간 한반도 국토기행을 하며 화첩에 진경산수화를 그리기도 했다. 또한 지구촌을 다니며 현지를 취재하는가 하면 그 나라에서 자신이 그린 한국의 독도화를 전시 한국의 영토임을 알려왔다. 그가 독도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가 된 사연은 부친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에 의해 억울하게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남양군도의 섬에서 갖은 고생을 겪은 억울한 한 풀이로 시작됐다는 전언이다.
사진: 미주중앙일보 2014년 8월 (권용섭 화백 제공)
2014년 8월 권화백은 부친에 고생에 대해서 어려서부터 말로만 전해 듣다가 나중에 부친의 유품을 정리하던 과정에서 찾아낸 부친의 남양군도의 경험을 담은 진본 책자를 미주중앙일보 이원영 편집국장에게 제보하여 단독 특종 보도를 내는데 일조 하기도 했다. 일제에 징용돼 남양군도 등에서 고생하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다시 미군 포로가 됐던 한인 징용자들이 하와이 수용소에서 만든 주간지 '자유한인보' 4,5호 진본을 발견한 것이다.
2000년 작고한 권화백의 부친 권임준 씨는 1944년 7월 강제 징용된 후 오키나와에서 미군 포로로 잡혀 하와이에 수용됐다. 자유한인보는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후 주간지 형태로 7호까지 발간됐다. 원본은7호만 국가기록원과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고, 지난해 말 3호 사본이 발견된 것 외엔 그동안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었다. 독립기념관 측은 “일제시대를 관통하는 독립 운동 및 우국지사들과 맥을 같이하는 한인 징용 포로들의 육성이 담겨 있어 독립운동사에도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했다고 신문은 보도 한바있다. (미주중앙일보 단독보도 – “일제 징용자들이 만든 '자유한인보' 진본 발견” 8월18일 2014년)
사진: 미주중앙일보 2014년 8월 (권용섭 화백 제공)
권화백은, “1977년 여름, 독도에 가려고 울릉도에서 6명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 4명을 급작스런 파도에 잃고 친구 하나와 자신만 기적으로 살아 돌아오며 한동안 독도 스케치를 포기하는 아픔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1998년 11월 두번째로 금강산관광선을 타고 북한을 방문, 현지에서 60여점의 금강산진경을 전시하기도 하여 남북한 양쪽에서 이름이 알려진 화가이기도 하다.
자신의 모필(붓)이 50년의 철벽을 넘어 북한도 다녀 왔는데, “감히 일본이 억견을 늘어놓으며 우리의 땅 독도를 못가게 하는 망발을 부려대다니...”라면서, 2000년 모리총리의 독도망언에 시위 차 독도를 방문하기도 했다. 권화백의 말에 의하면, “당시 정부의 안일한 대치는 경상북도와 중앙정부가 일본에 눈치를 보느라 그의 전시회를 돕기는커녕 따가운 눈총으로 1차 경북도청 전시는 거절 당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연한 그의 모필처럼 경찰본청과 경북도청 등 각 경찰청 등 관공서에서 독도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행운이 따라 줬는지, 마침 경찰청은 ‘포돌이 미술관’을 설립 했을 때여서 그 개막전은 권화백도 참가를 하는 등 그는 독도와 금강산 그림의 전시를 하는데 많은 기적이 따랐다고 권화백은 회고한다. 그래서인지, “노력보다는 운이 따라준 행운의 화가라는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세간의 평이 있어도 본인 스스로 늘 감사하면서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는 2004년 두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택한다. 이후 그는 순수한 민간인으로서 미주는 물론 유럽 남미, 아시아까지 20여개국을 돌며 독도그림전과 수묵화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지구촌에 한국문화와 독도를 알리는데 일조했다.
그런 그가 이 번에는 순수한 개인자격으로 평창동계올림픽 홍보에 동참하기로 했다고 유정신보에 알려온 것이다. “정부의 홍보물을 보면 노심초사 믿을 수 없다”라고 권화백은 말한다. 또다시 큰 붓 한 자루와 대형천을 말아서 지난 2월 스페인을 방문한다. 관광지에서 화폭을 대신하는 대형천을 펼쳐놓고 스페인 현지의 풍경을 그리는 즉흥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독도를 그렸다. 그의 그림이 들어간 책자와 경상북도가 재작한 책자를 보여주면서 현지에서 독도를 홍보하기도 했다.
그리고 'Let s go to Pyeong Chang together' 라는 타이틀의 수묵화 퍼포먼스를 가지고 유럽을 순회 하는 계획을 세웠고, 지난 가을 10월 3일은 이탈리아를 방문해 이번에는 우리 교포들과 함께 독도와 평창을 자랑했다.
-평창에 눈길을 돌리게 된 동기는
권화백: “나에게는 추위 속에 너무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비교적 따뜻한 영남지역 시골(경북의성) 출신으로 스케이트자체를 모르는 지방에서 태어났죠. 얼음을 지치면 어른들로부터 야단을 맞는데 위험도 따르는 저수지에서 얼음을 지치기 때문이지요. 어릴때, 빙상놀이가 좋아서 동내에서 가장 먼저 스케이트(중고 1,800원)를 사가지고 어른들이 일어나기 전 새벽에 몇 시간씩 몰래 스케이트를 탔습니다. 산속에 있는 작은 연못이라서 직선보다는 대부분 코너로 회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추운 전방으로 군입대를 해보니 스케이터들의 전당이라는 '산정호수'가 근처에 있더라고요. 스케이트를 타고 싶어 빙상부를 자원을 했는데 코치가 "저놈은 스피드는 안 나오지만 코너웍이 예술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 인연으로 겨울이면 산정호수 합숙훈련을 했습니다. 산정호수는 한국에서 가장 빙질이 좋은 곳으로 전국 대학 아이스하키팀과 ‘리라국민학교’등 빙상훈련을 함께 했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산수화를 그리는데 이 아름다운 산정호수라는 자연에서 스케이트도 타고 군대에서 주는 밥 먹으며 그림도 그렸으니 일생에 최고의 행복을 누린 것 같습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젊음의 함성과 스케이트 날이 링크에 스치는 소리가 귀가에 쟁쟁합니다. 그래서 못 다 이룬 꿈을 딸 아이에게 전수 하고 싶어 대구에서 태능선수촌 근처로 이사를 했는데 애들이 스케이트는 몇 일의 놀이에 그치고 그림 그리기를 더 좋아하더라고요.
김연아의 출현은 나에게 충격이었고 가장 부러운 존재였습니다. 여자 어린이의 스케이팅은 빙상의 꽃이죠. 그래서 지금도 미국생활 15년을 접고 다시 산정호수에 살고파서 지난 해 포천에다 보금자리를 마련 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동계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개최되어 누구보다 쌍수를 들고 춤추며 축하하게 된 것이죠. 내년에는 제가 60이 되는 해 입니다. 스케이터로는 노장 이지만 경기 링크에 꼭 한번 서보고 싶은데 안되겠죠? (웃음)
그래서 어둔할지는 모르지만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에서 한국을 상징하는 소제로 수묵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것도 9분간만 말입니다. 제가 2002년 월드컵 때는 안면도에서 60미터를 3시간만에 그린적이 있는데 관객이 지겨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초스피드로 하고 싶은데 9분은 당시 5.000미터 링크를 이영하 선수가 8분 몇 초를 기록했고 저희 팀은 9분을 깨는 것이었지요."
권화백은 그렇게 대화를 하는 순간만은 확실히 20대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을 탄 것같이 활기가 넘쳤다.
-"60에 가능 하시겠어요?"…빙상은 미끄러지는 묘미가, 수묵화도 우연의 실수가 작품화 되기도
권화백: "하하 빙상은 미끄러지고 넘어지는데도 묘미가 있지요, 마찬가지로 수묵화의 묘미도 어떻게 보면 우연의 실수를 역으로 작품화 하기도 하는데 그것을 한번 접목 해 보고 싶어요. 그림과 스케이트 이 둘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인 것만큼 여러분들이 주선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평창에서 제가 가진 미력한 재주이나마 작은 한 모퉁이라도 잔잔한 아름다움을 꾸미게 응원 해주세요.”
그의 다짐은 60대에 들어선 나이에도 불구하고 도전의식과 함께 속이 꽉 차고 끼와 기운이 옹골찼다.평창올림픽 성공기원을 위한 독도화가! 보기 드문 애국활동이다. 권화백과 가족은 독도홍보를 위해 오랜 해외 생활로 고국사랑이 누구보다 몸에 배여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국가운영에 있어도 문화가 첨병이 되면 모든 것이 마찰 없이 순조롭다”라고 개인적 견해를 밝힌다. 실제로 그는 독도그림으로 평양은 물론 일본인 학교에서도 전시를 한 바가 있다. 또 LA다운타운에 있는 일본 대사관에서도 독도행사를 거부감 없이 개최하였다.
지난 달 9월 14일 한국에서 이희번 평창조직위원장, 이기철 총영사, 로스앤젤레스시와 올림픽 중계권획득 방송사인 미국 NBC 관계자 등 20여명이 참석한 평창올림픽 미주후원행사에서도 그는 열정적으로 퍼포먼스를 펼쳤다.
(왼쪽 첫번째 이기철 라성총영사, 가운데 권용섭 화백)
행사를 치르면서 경험한 에피소드 한가지를 권화백은 이렇게 말한다. “많은 인사들이 참석해 인사와 축사 등으로 예정시간을 넘기니 객석에서 배가 고프다며 식사를 하자는 볼맨 소리가 점점 커졌어요. 그래도 준비 된 9중창단 공연을 강행하다가 곡이 단축된 상황에서 제가 보여 줄 '권용섭의 40초 수묵속사퍼포먼스'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염려스럽게 다가와 "화백님의 퍼포먼스는 지금 못하겠으니 나중에 해요." 당황스럽기도 해서 제가, "40초도 못 참을것 같아요?라"고 되물어 봤더니 말하길 오신분들 항의가 심각하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금강산도 식후경'을 택했습니다.
한인사회에 많은 행사에 참석해 보면 기도와 축사가 너무나 과도하게 길게 이어지기 일수였습니다. 정작 프로그램에 들어있는 본 행사는 분초를 다투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후 식사 도중에 아나운서는 무대에 큰 천을 펼쳐놓고 나를 불러 올렸습니다. 나는 사태를 의식이나 한듯이 스케이트를 치켜 들며 "올림픽은 스피드의 축제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시간을 뺏지 않기 위해 40초간만 수묵화를 그려 보여 드리는 퍼포먼스를 하겠다"라고 선언을 했더니 관객은 흡족해 하는 것 같았어요. 시연에 앞서, “40초에 의미를 둔 것은 40년 전 포천 산정호수링크에서 내가 스케이트선수로 합숙훈련을 할 때 500미터 기록이 40초였던 추억을 그리기 위해서 라고” 소개했습니다.
2002년 한국월드컵기념 안면도 해변 퍼포먼스는 3시간이나 진행함으로 관객들이 지루했을 뿐 아니라 촬영진들도 뉴스시간이 됐다며 끝을 보지 못하고 가버린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최 단시간의 그림으로 행사에도 효과 있게 하려고 40년전의 엔틱 스케이트를 소품으로 준비했죠. 그런데 신발이 쪼그라들어 발이 불편 해 스케이트에 붓을 꽂아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스케이트를 타는 모델을 40초간만 그리고 무대를 내려오려고 하자 정작 지켜본 관중들이 시간이 많다면서 끝 마무리를 요구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기뻐하면서 다시 무대로 올라와 이번에는 5천미터의 기록인 9분동안(그림) 정자가 있는 강릉 경포호를 배경으로 해서는 한계령을 마저 그렸습니다.
이를 지켜본 관중들은 흡사 묘기 대행진을 보고 있는 것 같다며 여기저기서 박수를 쳤습니다. 조직위원장과 총영사 등 관객들은 흡족함에 다가와 참관인증 사인도 해 주셨지요. 이런 내 작은 몸 짓이 평창 올림픽선수들에게 격려가 되고 부상 없이 좋은 기록들을 세우기를 기원하며 무대를 내려 왔습니다."
지난 달 평창올림픽 방송사인 미국NBC는 권화백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기획을 의뢰해 왔다는 전언이다. 지구촌 여러 각 나라들이 그의 한국화 수묵 퍼포먼스와 전시를 기다리고 있다고한다. 라성의 권용섭 화백은 평창동계올림픽을 몸과 마음을 다해 정성껏 홍보해 줄 민간외교사절의 중요한 한 인물로 평가 할 수 있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