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대기업 ‘대우’가 무너진 본질적 원인
-1998년 불황은 IMF불황
-원인 규정의 주입문제: ‘유동성 문제’를 ‘부실’로 강제 규정
-기축통화 달러화 교환가치의 문제
-국제 환투기 세력의 영향-한국의 IMF 사태로 대표되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환투기'로 거액을 챙겨 나간 조지 소로스
-신장섭 교수...“이제라도 대우 해체, IMF 체제 재평가 해야”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고 김우중 대우 회장)
December 12, 2019
[유정신보=LA] 심흥근 기자
inchon7080@gmail.com
대우 그룹의 경우 소위 한국식 ‘재벌’의 문어발식 과도한 확장 등 기업 자체의 운영등의 내적인 문제에서 비롯된것이 아닌, 외적인 문제가 큰 탓으로 보여진다. 한국의 독특한 재벌의 정경유착은 당시 올바른 건실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는 평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기업 대우는 비교적 후발 신생기업으로 초기에 부채를 안고 출발 했다지만 세계적인 건설붐을 타고 크게 성장했고, 자동차 생산 수출 대기업체로 확장해 나아갔다. 이게 김우중 회장의 리더십인 인재등용, 실력과 신용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세계무대에서 도전과 경쟁이 가능한 일인가 말이다. 신화가 무너진 본질적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
우선, 한국 경제와 대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정치권의 미숙한 대응 탓이 크다고 본다. 그 당시 한국기업들이 여기저기 투자를 많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의 상당 부분이 부실투자였다고 규정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예를 들어 한보철강이나 대우자동차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부실투자' 사례였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며 이권에 개입한 해외 외부의 금권세력 (IMF) 기관 에서의 규정의 주입문제로 ‘유동성 문제’를 ‘부실’로 강제 규정한 원인으로 그 피해가 막심해 지고 결국 대기업 대우의 몰락을 재촉했다는 견지가 오히려 타당하다. 이런 외부세력의 편견적 규정 문제를 똑부러지게 짚어내지 못한 당시 한국 정치권은 손을 놓고 있었다는 얘기다.
김우중 회장... 아시다시피, 평범했던 샐러리맨이 단돈 500만 원으로 회사를 세웠고, 그 회사는 ‘세계 경영’이라는 기치를 내걸며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를 누비고 다녔다. 회사 이름은 대우. 그 지역에서 대우는 대한민국보다 더 유명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좌초할 때 대우는 매출 71조 원, 자산 78조 원으로 한국 재계 순위 2위였다.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CTAD)는 1997년 대우그룹을 개발도상국 출신 다국적기업 중 해외자산 규모 세계 1위에 올려놨다.
승승장구하던 대우는 대한민국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부터 급격하게 몰락한다. 이때 IMF가 돈을 빌려주면서 내건 조건은 철저한 구조조정이었다. 구조조정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핵심은 부실기업을 정리하고 합리적인 경영을 하라는 것이었다. 부실로 판정받은 기업은 자산을 매각했고, 합리적인 경영을 위해서는 대규모 감원에 들어갔다. 이런 맥락에서 대우도 예외일 수 없었다. 특히 당시 신흥국 시장 개척에 매진했던 대우의 사업 중 많은 부문이 부실로 판정받았다. 대우자동차가 GM에 팔리고, 다른 계열사도 뿔뿔이 흩어졌다. 김우중 회장은 한국을 떠나 오랜 시간을 외국에서 머물렀다.
대우그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우의 흔적은 국내와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대우인터내셔널, 대우건설, 대우조선해양, 두산인프라코어(대우종합기계)는 여전히 세계적 명성과 함께 한국 경제의 주역으로 활동 중이다.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 등의 신흥국에서 대우의 가치는 한때 대한민국보다 앞섰지만 정작 우리는 무지했다.
세계적인 대기업 ‘대우’가 무너진 배경의 외적인 변수로 1)첫째 국제통화의 교환 표준화가 안정되지 못함에 있고, 따라서 손해를 봐도 국제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가능성이 크다는데 있지 않을까. 2)둘째, 세계 각지의 다발적 전쟁도 주요 변수일 듯 하다. 전쟁자금 조달로 인한 국제수지 적자 발생, 통화량 증발에 의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달러가치가 급락, 일부 국가들이 달러 대신 금으로 변상을 요구. 3)세번째로, 세계경제 무대인 세계6대주의 각나라 별로 국영은행의 통화 정책의 형편과 사정이 각기 다르다, (프랑, 페소, 쿠나, 크로네, 루피, 디나르, 셰켈 etc 등등) 따라서 세계 각나라를 상대하는 신생 기업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생겨 앞일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대우는 아시아권 신생 기업이지 않았는가. 4)넷째, 국제 환투기의 대형 환치기에 대우 같은 신생기업이 억울하게 당할 위험성이 매우 높다. 5) 다섯째, 원인 규정의 외부 금권세력의 주입문제: ‘유동성 문제’를 ‘부실’로 강제 규정에 따른 한국 경제에 미친 막대한 피해 등으로 정리 해 본다.
글로벌 에코노미, 비교정치경제 측면에서 볼때, 천연자원을 팔아먹고 사는 캐나다 경제(staples economy) 형태와 비슷한 저개발국 혹은 개발도상국에 겨우 올라선 가령 남미의 어느 한 나라가 그나라의 중심 교환 통화를 기축통화인 미국$달러를 수용했나의 여부 즉, (“dollarization”)을 했는가 아닌가에 (프랑, 페소, 쿠나, 크로네, 루피, 디나르, 셰켈...중국 위안, 일본 엔화, 영국 파운드화, 유로화) 등등에 따라서 손익차가 크게 달리 나타난다. 미국 달러를 수용해서 득을 본 나라도 있고 반대인 나라도 있다. 이런사정에 의해 세계를 무대로 뛰는 기업은 각 대륙별 정치문화적 위험요소를 대처하고 방지하기 쉽지 않다고 본다.
여담이지만, 금본위 제도가 29년 대공황 맞아 31년 폐지되고, 2차대전 직전 44년 Bretton Woods system가 탄생하여 국제통화를 대체 했으나 71년 또 무너진다. 세계무역은 축소화의 경향을 지게되며 한편 후진국에는 악영향을 주었다.
신 브렌튼 우즈 시스템에 기대를 하지만 아직 실체가 없는 시스템이다.
각국의 법망을 교묘히 벗어나 파고드는 국제 환투기 세력의 침투 환경에서 건실한 신생기업이 억울하게 당할 위험성이 매우 높다. 일례로 외환 시세의 상승으로 인한 매매 차익을 얻을 목적으로 많은 양의 환을 매매하는 전문가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는 환투기 헤지펀드 매니저로 1992년 영국에 ‘검은 수요일'을 야기한 주범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는 한국의 IMF 사태로 대표되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도 ‘환투기'로 거액을 챙겨 나간 바 있는데 당시 도미노 처럼 잇달아 붕괴된 동남아시아 발 통화위기가 한국에까지 미칠것이라는 것을 적확히 예상했을것이다. 일각에서는 1997년 한보그룹에서 시작된 부도가 기업들의 연쇄도산을 불러왔기 때문이며 그 돌풍은 대한민국 재계 2-3위를 다투던 그룹, 대우에까지 이어진것이 파산 요인이라고 분석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닌것으로 보여지는 이유이다.
상기해보자. 신장섭 교수의 분석 문헌에 따르면, “국제 금융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한국경제가 외환위기에 처했을 때에 이를 단순히 '유동성 위기'로 규정짓고 돈만 추가로 빌려주면 얻을 것이 별로 많지 않았다. 반면 이것을 '구조적 위기'로 규정짓고 대폭적으로 구조조정을 시키면 얻어낼 것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한국의 국제통화기금의 구조조정 요구로 인한 IMF 사태때 국내 YS 나 DJ 관료들은 IMF의 한국의 ‘후-후발 개발도상국’으로서의 위치를 도외시한 과도한 구조조정 요구에 정치권은 눈하나 깜작않고 무시하고 버텼어야 했다. 넓게는 왜 당시 정치권은 이 사태를 유엔헌장에 근거한,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ICJ)의 국제법 소송으로 끌고가서 승소하지 못했는지 안타깝다. 좁게는, 당시 한국 외교부는 국제 로비 단체와 로비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한국의 손실을 줄였어야했다.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최초로 수립한 장면 내각의 관료들, 그리고 이를 실행으로 이끈 관료권위주의적 박정희 정권의 엘리트들은 이 사태를 직면한다면 십중팔구 달리 대처했을 듯 하다.
97년 IMF 당시 얼마나 많은 건실한 중소기업체가 문을닫고 수많은 아까운 생들이 억울하게 마감했나... 왜 국민들의 귀중한 장롱속의 결혼반지 돌반지까지 슈킹 해 가도록 위정자들이 나서서 독려방조했는가 말이다...책임자리의 국가 지도자가 너무 안일한 대처를 한것이 아닌가한다.
국제사법재판소 (ICJ)로 끌고 들어가 방어 했어야 했다. 더욱이 실질적 방어의 법적근거는 또 있다. 만일 필자가 당시 DJ 관료였다면, 이를 미국연방대법원에 상소 했을것이다. IMF 기관의 한국실정을 도외시한 구조조정 요구에 대해서, 예컨데 “reasonable and just," 원칙을 들어 이를 좁게는 미국연방 대법원의 “각주간의 상도덕법(Interstate-Commercial Law)”의 각 세부적인 규정과 판례를 들어 미연방 대법원에 소송하거나 탄원을 제기하여 끝까지 방어해 냈을것이다. 만일 미국 연방대법원의 시심관할 영역으로 이 제소가 수월하지 않다면, 다시 이를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로의 회부대상으로도 끌어올려서 국제정치적의결로 풀어 낼 개연성은 충분하다.
97-98년 당시 사설 헤지펀드들은 한국기업의 유동성 위기의 (한쪽으로 퍼지는 유동성 위기가 자동으로 다른 쪽으로 spill over 되는 현상과 다른) 순환정체상황을 사전에 파악한다. 설상가상으로 IMF 는 한국 대기업들의 ‘유동성 문제’를 ‘부실’로 강제 규정하고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법망을 교묘히 파고들어 틈바구니를 악용하는 헤지펀드 운용사들이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악용하고 착복했는지가 명백히 드러난다.
김우중 회장의 입장은, ‘IMF 위기는 금융위기였으나, 이 책임을 산업 기업체들에 전가하는 과정에 대우가 해체됐으며, IMF 프로그램을 당시 정부가 아무 비판 없이 시행하는 바람에 한국은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든 데다 고용 불안이나 제조업 경쟁력 약화 등 경제 체질 전체도 악화된것으로 인식했다.
한국을 앞서서 망치는 주세력은 정치권 위정자들이거나 행정관료들이다. 그것도 민주정권에서 더한다. 촛불 민주정권으로 바뀌고서도 관료들의 뻣뻣한 경직성은 여전하다는 세간의 평이다. 이 관료들이 대부분 소위 유학파 명문대 출신들로 영미권 신자유주의 고약한 사상에 물들고도 비판의식을 갖지 못하고 반성도 안하고있는것이 큰 문제다.
97년-98년 (IMF - 본질적으로 서구 선진국들의 금권이익을 위한 금융리그인) IMF의 구조조정 요구는 한국경제와 기업에 대한 ‘부실’이라는 주홍글씨 씌우기다. 별 이견도 내세우지 못하고 그저 순순히 순응한 민주 DJ정권하의 경제관료들의 행위는 다시 규명되어야한다. 커미션을 흔들었을 듯 하다.
당시 IMF의 구조조정 요구에 경제 관료들이나 금융감독원은 자금의 유동성 문제로 고군분투 하는 자국기업들에게 ‘부실’로 규정해서 기업들의 회사체 발행도 금지시켰다. 그래서 한창 전세계로 잘 나가던 Daewoo 그룹을 망하게했다. 당시무렵 전세계에서 ‘대우 그룹과 대우 자동차, 대우 건설’은 동남아 중동 동유럽 오지 마을에도 다 알아도 대한민국은 잘 모를때였다. 당시 DJ 경제 관료나 금감원은 자국 기업체와 산업편 입장에서 손을 들어 줬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IMF 등 금융편을 앞장서서 변호하며 손을 들어줬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세간에는 당시 금융권을 비호 지지한 정치권 관료중 누군가는 커미션 리베이트 떡고물을 챙겼다는 의혹도 제기한다. 신장섭 교수의 지적대로, 이제라도 대우 해체, IMF 체제를 재평가 재규명 해야 마땅하다고 보는것이다.
고 김우중 회장 생전 직접 인터뷰 하여 <김우중과의 대화 :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2014> 책을 낸 신장섭 교수가 전한 내용을 발췌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김우중 회장은 “돈 벌려고 한 게 아니다. 나라 잘되려고 했다.” 이런 말을 굉장히 자주 하면서 공동체 강조했다. 정말 독특한 기업가다. 만나서 이야기해도 비즈니스 이야기는 별로 안 하고 한국 경제, 기업가, 젊은이,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하더라. 대우를 경영할 때도 국내 중소기업 하는 분야에는 안 들어가겠다고 했고. 이들과 함께 외국으로 데리고 나가고 싶어 했다. 일찍부터 번 돈을 사회 공헌에 많이 내놓았다. 아프리카에서도 50대 50 법칙이라 해서 그쪽과 공생, 상생하는 걸 고민했다. 한번은 “예전에야 국가 발전과 기업 발전이 함께 갔지만, 선진국으로 가면 기업가에게 이런 마음이 약해지는 게 아닌가” 하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선진국 되면 민간 역량이 강해지면서 마음만 먹으면 국가 발전과 궤를 함께하는 게 더 쉬워진다고 답하더라. 마음 먹기에 달린 거다. 지금 주는 메시지가 굉장히 크다. (발췌: 신장섭 “이제라도 대우 해체, IMF 체제 재평가 해야”)
고인은 최근까지 베트남 등지에서 해외 기업인 양성에 힘쓰다가 지난 월요일 12월 9일 (2019) 오후 11시 50분 수원시 아주대병원에서 (연명치료를 거부)노환으로 향년 82세로 별세하였다.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고 김우중 대우 회장의 저서 표제어를 기억하며...
-끝-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김우중 전 회장이 1989년 펴낸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참고문헌:
<1998년 불황은 IMF불황>
발췌:
신장섭 국립싱가폴대 교수의 "금융전쟁, 한국경제의 기회와 위험" 책에 나오는 내용
(전략) 당시 한국기업들이 투자를 많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의 상당 부분이 부실투자였다고 규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예를 들어 한보철강이나 대우자동차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부실투자' 사례였는데 다시 살펴보자.
한보나 대우가 대규모 투자를 했던 것은 중국 등 신흥시장의 고속성장 가능성을 보고 벌인 일이었다. 이 혜안은 실제로 맞아 떨어졌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은 전세계의 철강을 빨아들였고 국내의 모든 철강회사들이 중국특수를 노렸다. GM이 인수한 GM대우도 신흥시장에서 소형차 수출 호조 덕분에 GM의 '현찰공급원(Cash Cow)'이 됐다.
미래를 내다본 산업자본가들의 투자판단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이들은 단지 공격적 투자를 할 경우 유동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이 유동성 관리에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낫다. 만약 1998년 당시에 이 투자자들을 '과잉투자' 혹은 '부실'로 규정짓지 않고 이번 금융위기 때처럼 정부가 유동성을 공급해주면서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게 해줬다면 과거 조선산업이나 반도체산업과 같은 성공신화가 만들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998년에 부실채권이 많아진 것은 부실이 많이 있었다기보다는 '유동성 위기'를 '부실'로 규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998년 세계경제가 좋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이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었던 것은 'IMF불황'이었다고 이름붙일 수 있다.
상기해보자. 국제 금융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한국경제가 외환위기에 처했을 때에 이를 단순히 '유동성 위기'로 규정짓고 돈만 추가로 빌려주면 얻을 것이 별로 많지 않았다. 반면 이것을 '구조적 위기'로 규정짓고 대폭적으로 구조조정을 시키면 얻어낼 것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한국 정부는 당시의 정치경제적 여건에서 이 '구조적 위기론'에 동의했고 이를 한국경제의 정사(正史)로 만들어 갔다. 이번 금융위기 때에 BIS비율 규제를 오히려 강화한 것은 그동안 국제금융시장의 몸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스스로 만들어 놓은 정사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금융전쟁, 한국경제의 기회와 위험" 중에서 발췌)
*참고). 추천문헌 더 읽기
[다시읽는 추천 명저]
김우중과의 대화 :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신장섭 저 | 북스코프 | 2014년 08월 26일
대담글, 신장섭 “이제라도 대우 해체, IMF 체제 재평가 해야”
『김우중과의 대화』 저자 신장섭 박사 대담 인터뷰
-대우는 IMF 체제 희생양, 신흥 관료의 선택은 옳았나
http://m.ch.yes24.com/Article/View/26171